집에만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인지 쉽사리 잠이 들지 않는 밤이 다시 찾아왔다. 거기다 늦은시간 아무생각없이 커피를 벌컥 마셔버렸다. 역시나 일찍 잠들긴 글렀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러닝을 하고 싶지만 전에 뛰고난 후에 아직 다리가 회복되지 않아서 걷기로만 마음을 먹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토요일이라 그런지 호수에는 사람이 많았다. 아마 코로나 때문에 갈 수 있는 곳이 없는 것도 어느정도 작용을 했을거다. 나도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서 걷기 시작했다. 호수는 먹물 같이 까맣게만 보이고 둘레를 따라 가로등이 촘촘히 켜져있다. 운영을 하지 않는 롯데월드는 조명을 다 꺼둬서 숨어있는 것 처럼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호수 옆쪽엔 이맘때만 되면 운영하는 임시 선착장이 떠있다. 동호와 서호의 경계에 서있는 온도계는 어느덧 25도까지 내려왔다. 바람이 적당히 시원했다.
가끔씩 혼자 호수를 천천히 걷다보면 바로 몇미터 주위에 사람들은 계속 지나가지만 혼자만의 분리된 세상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럴때는 에어팟 프로도 역할을 톡톡히 한다. 또 그러다 보면 본의 아니게 주위의 사람들을 관찰하게 되기도 한다. 주말에 출근을 한 건지 포멀한 차림으로 기운이 빠져보이는 여자, 팔자걸음으로 느긋하게 걷는 나이 지긋해 보이는 아저씨, 급한일이라도 있는 것 처럼 총총걸음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아주머니, 혼자 또는 끼리끼리 짝을 이뤄 달리는 사람들 등등 제각각 각자의 호흡으로 걷고 뛰고 또는 번갈아가며 앞으로 나아간다. 물론 아주 가끔은 뒤로 가는 사람들도 있다. 위험하다.
내가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이 동네에 살기로 마음먹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석촌호수였다. 물론 지금도 걸을 때 마다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처음 호수를 봤을 때는 벚꽃이 만개하던 봄날의 낮 이었지만 지금은 해가 지고 난 후를 더 좋아한다. 특히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름과 가을 사이에 잠깐 찾아오는 밤 날씨, 바로 지금 같은 날씨에는 더할 나위 없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걷다보면 몸도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 지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주변 사람들을 보면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누군가 그랬다. 바다는 비우러 가고 산은 채우러 간다고. 그 말을 듣고 아! 격한 공감이 들었었다. 비록 바다는 아니지만 호수도, 강도 비슷한 느낌인 것 같았다.
이렇게 많고 다양한 사람들이 다들 뭘 비우고 있는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주로 생각을 비우러 간다. 항상 생각이 가득하기 때문에 이따금씩 비워줘야 한다. 누군가는 하루 동안 받았던 스트레스를 털어버리기도 할테고 남모를 슬픔이나 무거웠던 어깨의 짐 또는 마음의 부담을 살짝 덜어내기도 하는 것 같다. 가끔씩은 몸의 부담을 덜어내기 위해 열심히인 사람들도 보이기도 한다. 뭐든지간에 그게 희망이나 의지, 용기 같은 것들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도 살짝 가져봤다.
그리고 일부는 채우러 온 사람들도 보인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움직이지 않는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많은 느낌이다. 코로나 때문에 저녁에 술집이 문을 닫자 잔뜩 사들고 밖으로 나온 듯 싶다. 어차피 그렇게 오밀조밀 모여서 마스크 벗고 떠들어 대는데 안이나 밖이나 무슨 차이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런 사람들도 돌아갈 때 비우는게 있긴할거다. 물론 그들의 손도 포함해서.
여튼 이렇게 천천히 한 걸음씩 비우고 나면 다시 채워질 준비가 된다. 한 바퀴가 대략 2.5km가 넘기 때문에 몇 바퀴 돌다보면 힘이든다. 물론 달린다면 몇 배로 더 힘들다. 하지만 산책을 다 끝내고 나면, 심지어 뛰고 난 후에 몸에 힘이 쫙 빠져나간 순간에도 호수를 나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은 가볍다.
다음엔 또 뭘 비우러 올지는 모르겠지만, 하루하루 채우고 비우고를 반복하다보면 언젠간 내가 원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지는 하루도 오지 않을까 기대를 해본다.